처음에 '세계와 화해하기'라는 소제목을 보았을때 평화 같은 주제를 다루게 될거라는 생각을 했다. 세계와 화해한다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며, 피히테, 셸링, 헤겔 세 사람의 이름을 봤는데 헤겔 밖에 모르겠다. 아... 물론 헤겔도 뭘 안다기보다는 그냥 이름을 많이 들어봤다 정도지만.

 

수업은 칸트가 남긴 문제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칸트는 크게 두 가지 문제를 후대 철학자들에게 남겼다. 첫번째는 역사성에 관한 문제, 즉 이성이 '시대의 산물'인가 혹은 '보편적'인 것인가 라는 문제이다. 두번째는 학문으로서 철학의 문제이다.

 

역사성에 관한 문제는 이성이 '시대의 산물'인가 혹은 '보편적'인 것인가 라는 문제이다. 첫번째는 개체화. 특정한 역사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시대마다 독특하고 특별한 것으로 이성을 보며, 이성의 본질이 그때그때 다르다고 생각한다. 두번째, 이성이 보편적이라고 한다면, 변화와 운동의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이성을 바라본다.

 

학문으로서 철학의 문제는 현상계와 예지계를 구분하는 문제와 물 자체(Ding an sich)의 문제로 나뉜다. 칸트는 순수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통해 감성과 도덕을 나타냈다. 순수이론이성은 물리학과 같은 과학이 대표적이며, 실천이성은 윤리학이 대표적이다. 이 둘을 합하려는 노력을 통해 철학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물 자체의 문제. 물 자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이다. 지성의 작용은 항상 현상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감성(수용적 직관)을 촉발하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물 자체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칸트의 판단근거는 인과성(선험적 종합판단)이다. 인과성은 현상계에서만 경험과 동시에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 외에 주체의 문제도 있었다. 이성을 법정에 피고로 세울때 재판장도 이성인데, 재판장으로서의 이성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나타난 피히테(Fichte)!

피히테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현상계와 예지계의 설명하기. 즉, 물 자체와 현상을 통일적으로 설명하기. 두번째는 초월적 주체의 문제를 해명하기.

피히테는 자신의 문제 의식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아와 비아를 통일시키는 원리로서 자아를 설정하고 지식학(Wissenschaftslehre) 3원칙을 세운다.

 

제 1원칙 "나는 활동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제 2원칙 "자아는 비아를 반정립한다. 나아가 자아는 비아를 자기 안에서 반정립한다."

제 3원칙 "자아는 자아 안에서 가분적 자아에 대해 가분적 비아를 반정립한다."

 

여기서부터 머리가 아파지는 부분이 용어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현상계와 예지계만해도 머리가 아팠는데, 이 사람은 또다른 용어를 정립해서 사용한다. "나"가 있고, "나" 안에 "감각하는 나"(가분적 자아)와 "감각되는 사물"(가분적 비아)이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을 합쳐서 "자아"라고 칭한다.

 

피히테의 관념론을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칭한다. 선험적 자아 이전의 활동 그 자체로서의 자아가 등장했고, 자아를 출발점으로 삼아 모든 대상을 자아의 정립으로 환원하여 일원화했다. 그래서 물 자체의 가정으로 생긴 진리의 문제나 체계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했다. 즉, 물 자체를 비아로 설정하고, 실재는 자아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대상에 대한 앎은 주체와 대상이 일치하지 않으며, 자기에 대한 해명이고, 절대적 자아의 해명과 탐구 과정이라고 보았다. 또 체계의 문제는 자아의 다양한 표현(다차원성)이라고 생각했다.

 

 

두번째는 셸링(Schelling)!

이 사람의 이름은 사실 자주 들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가 Schellingstrasse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셸링이 그 셸링인지 모르고 다녔을 뿐. 수업을 듣고 보니 이 사람 이름을 대학교 건물이 가득한 쪽에 붙일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셸링의 관념론은 객관적 관념론이라고 불린다. 셸링은 주로 2가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첫번째는 칸트의 이원론적 세계관과 자기 의식. 두번째는 피히테 비판. 대상/물 자체, 자연은 자아에 의해 산출되거나 도출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셸링은 칸트의 자기 의식을 비판하며 통각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물 자체 -> 감성, 시공간 --상상력-->지성의 범주(12개) -> 인식

 

이런 과정을 거치는 통각이 모여 나를 이룬다고 보았다. 통각의 작동은 항상 대상의 제약을 받으며(경험의 제한), 자기 인식은 대상의 규제를 받기 때문에 절대적이지 않다. 그래서 셸링은 절대적 원리를 찾으려 한다. 그가 찾은 자아는 지적으로 직관되는 자아(<철학의 원리로서의 자아>).

 

피히테에게 절대적 자아란, 지식학의 원리 및 근거라면, 셸링에겐 지식학의 근거일뿐만 아니라 모든 학적인 전제를 직관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을 주체화 혹은 자아화한다. 셸링에게 있어 자연은 물질이자 정신 곧 동일한 현실의 다른 측면이며, 자연 개개의 현상들은 주체-객체의 통일된 절대자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헤겔(Hegel).

 

그의 저서 <정신현상학>에 나온 내용을 주로 다루었는데 진리가 발전하는 방법은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과 같다고 설명해주셨다. 현상 A, B를 설명하는 패러다임 (가)에서, 현상 C가 등장함으로서 현상 A, B, C를 함께 설명하기 위해 패러다임 (나)가 등장하고 그런 과정을 반복함으로서 진리가 발전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나온 패러다임을 절대정신이라고 보았다.

 

절대정신의 운동으로 변증법이 있으며, 이 변증법은 출발이 되는 개념에서 부정이 부과되고 투쟁이 발생하며, 투쟁이 높은 지평으로 상승(aufheben)함으로 해소가 되어 새로운 개념이 도출되고 앞의 과정을 계속 반복하다보면 절대적 관념론에 이른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의 관념론을 절대적 관념론이라 부른다. 절대적 관념론은 절대자에 대한 관념론이며, 절대 정신을 통한 일원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와 함께 변증법이 계속되고 있다.

 

 

피히테, 셸링, 헤겔을 일컬어 독일의 관념론자들이라 부른다. 그들이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무덤에서 나오고 싶을수도 있겠지만. 관념론부터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절대자 또는 절대정신, 자연 등으로 표현되는 나를 포함한 거대한 정신이다. 이들은 세계관의 변화를 이끌어내며 철학을 또 한단계 발전시켰다.

 

 

정리를 한다고 했는데, 벌써 2주전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 곳도 많고, 필기하느라 급급했던 부분도 많은 것 같다. 또 오류도 엄청날 듯하다. 이 부분은 스스로 공부하면서 채워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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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달간 들었던 <함께 읽는 서양철학사>가 종강했다.

원래 계획과는 달리,

최선을 다하지 못해서 책을 다 읽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지만, 좋은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철학이라는 것이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닌,

우리의 삶을 설명해주는, 우리의 삶을 재조명하고 삶의 동력을 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내 고민이었던 과학과 신앙과의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을 새로이 발견하는 일도 가능하겠구나 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그래서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블로그에 리뷰를 쓰려고 했는데, 내용이 방대하고 어렵다 보니 쉽지 않다.

그래도 7강과 8강은 써보려고 한다.

1강과 4강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은데,

나를 위해서 노력해봐야겠다.

 

또 한가지 생각은 소위 모태신앙이라고 해서 다 좋게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구나이다.

모태신앙이라는 이야기는 결국 교회 안의 폭력에 더 많이 노출되었었다는 이야기니까.

나는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부모님이 안계시다는) 내 어려움에 갖혀서 보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어려움 안에서, 상황 안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 아닌가 생각했다.

 

철학을 통해서 어떠한 인생의 답을 찾을 수 있다니.

8주 행복했고, 앞으로도 철학을 통해 행복을 찾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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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봤던 것 같다.

요즘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이 나오면서 더더욱 필요해진 질문이 아닌가 한다.

 

6번째 수업은 이 질문과 함께 시작했다. 철학이 이런 질문에도 대답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신기했다. 얼마전 읽었던 <인간의 얼굴을 가진 지식>에서도 철학이 중세 이전과 달리 어느순간에서인가 삶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삶이 묻어져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철학의 분과는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cal Anthropology으로 대표적인 학자로 막스 셸러, 미카엘 란드만, 아르놀트 겔렌, 헬무트 플레스너, 에머리히 코레트 등이 있다. 뭔가 익숙하다 싶었더니 다들 독일 사람이라고 한다.

 

철학적 인간학이 갑자기 나온 건 아니고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때부터 이야기가 되어왔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시간에 빠졌더니 이쪽 이야기만 나오면 정신을 잃을 것만 같다.

 

그리고 중세시대에 계속된 질문이 1. 인간에게 신체란? 2. 비물질적인 영혼과 물질적인 신체의 상호작용에 대한 것이었다. 첫번째 질문은 유물론/물리주의라는 결론에 다달았고, 두번째 질문에 대해 데카르트가 세가지로 대답하기를 하나님이 보증하셨다.(<성찰> 6번째) 송과선이라는 부분이 있어서 그쪽을 통해 비물질적인 영혼과 물질적인 신체의 상호작용이 가능하게 해준다. 일상생활과 일상언어와 같은 철학의 영역 바깥에서 증명이 가능하다고 했다고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칸트는 인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형이상학) 2.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도덕) 3.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종교) 4.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학) 이렇게 네단계로 생각해보았다고 한다.

 

여기서부터는 거의 죽을 것 같았다. 수업은 좋은데... 대체 알 수가 없는 말들의 향연이랄까. 그래도 필기해둔 것을 토대로 따라가보려고 한다.

 

첫번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만일 우리 인간에게 앎이 가능하다면 그 앎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환원 가능하다. 즉 "선험적 종합 판단은 가능한가"라는 질문과 동일하다.

칸트에 의하면 판단은 선험적 판단(a priori), 후험적 판단(a posteriori), 그리고 선험적 종합판단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선험적 판단은 경험에 앞서, 또는 경험과 동시에 알 수 있는 것으로, "총각은 결혼 안 한 남자이다"와 같이 단어를 표현할 때 단어 안에 이미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이다. 후험적 판단은 "사과는 빨갛다"와 같이 사과라고 해서 다 빨간 것은 아니므로 경험을 한 후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선험적 종합판단은 수학이나 자연과학과 같은 것으로 선험적 판단이면서 단어 안에 이미 뜻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

 

흄이 인간이 인식하는 바와 외부대상을 비교하며, 인간의 인식과 외부대상이 같을 때에만 인식가능하다고 했는데, 칸트는 외부대상에 맞게 인식한다고 말한다. 이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다.

 

감성의 조건과 지성의 조건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셨는데 필기만 봐서는 모르겠다. ㅠㅠ

 

두번째는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실천이성비판) 여기에서 칸트는 가언명령과 정언명령 이야기를 한다. 정언 명령 중 두 가지를 소개해 주셨다.

 

-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

-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타인의 인격에서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라.

 

뭐 이런 무지막지한 사람이 있나. 정언명령을 행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이러다가 딱 바리새인 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글을 이렇게 쓰기 있기 없기? 독일어로 저렇게 썼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해진다. 독일 사람들 특징인가? 글 꼬아서 쓰기가...)

 

세번째는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도덕적 용기에 대한 보상으로 행복한 내세를 요청해야 하며, 도덕 주체의 실현이라는 최고선을 위한 영혼불멸이 필요하다고 칸트는 말한다. 그리고 이를 주관하는 신이 필요하다고. 우리는 이런 것을, 혹은 칸트는 이런 것을 희망해도 좋다고 보았다.

 

마지막 네번째. 그래서 "인간은 무엇인가". 한발은 현상계에, 한발은 예지계에 두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말한다. 몇가지 더 말씀해주셨는데 와닿지 않아서 패스!

 

제일 와닿았던 말. homo viator 길을 걸어가는 인간. 인간을 신체와 영혼으로 나눌 것이 아니라 둘다를 가진 단일한 존재로 봐야 한다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를 발견하는 존재라는 것. 그래서 인간의 본질을 다차원성, 역사성, 단일성으로 요약 가능하다고 한다.

 

마지막 부분을 들으면서 <사피엔스>가 생각났다. 요즘 굉장히 핫한지만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많은 내용이 담긴 그 책. 그 책에 담긴 인간에 대한 시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다음 시간은 피히테, 셸링, 헤겔인데, 헤겔만 이름을 들어봤다. 며칠 동안 예습해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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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는 서양철학사>라는 수업을 새물결 아카데미에서 듣고 있다. 이 수업은 윤동민 선생님이 하고 계신데, 서강대에서 철학 박사과정을 밟고 계신다고 한다. 이 수업을 듣게 된 이유는 철학 수업을 통해 내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개강은 4/5에 했는데, 중간에 두번 못가고, 세번 출석을 했다. 들을 때마다 감동의 연속이라 두번 못 간 것이 너무 아쉽다. 5번째 강의의 리뷰부터 쓰게 되었지만, 내가 갔었던 첫번째와 네번째 강의의 리뷰도 쓸 생각이다.

 

지난 5월 3일의 주제는 데카르트, 흄과 함께 의심하기였다.

 

의심, 회의하기. 한국에 사는 기독교인으로서 의심하고 회의하는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은 흔히 구원의 확신이 있냐는 말로 피하거나 공격을 하곤 한다. 나는 사실 그런 공격을 받은 일은 없다. 아직 하나님을 알게 된지 10년이 안되기도 했지만 내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곳이 독일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은 멋진 분"이라고 말씀하셨던 (그 당시에 전혀 친분이 없던) 어떤 유학생의 이야기에 나는 예수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분의 소개로 갔었던 모임에서 어떤 목사님을 만났고, 나는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냈다. 그때 내가 했던 질문들은 주로 창조과학과 관련된 질문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때 짝이 기독교인이었는데 그 친구가 나에게 했던 창조과학 이야기가 이해가 되지 않은 채 내 속에 남아있었다. 그분은 회의해도 된다고 하셨다. 회의하고 고민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의 신앙 생활이 시작되었다.

 

데카르트와 흄에 대해 이야기하기 앞서, "계시(성경)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으로 강의는 시작되었다. 나는 쉽사리 답을 하지 못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살아가고 있지만, "정말 맞는가?"라고 물어본다면 질문에 답하기가 어렵다.

 

앎이란 무엇이고, 인식론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또 토대주의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토대주의는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나뉠 수 있으며, 합리론은 최초로 앎을 구성하는 논리적 토대가 정신적 직관이며, 경험론은 감각적 경험이다. 합리론의 대표주자는 데카르트이며, 경험론의 대표주자는 흄이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적이 있었으니, 그건 의심이었다. dubito ut intelligan. 둘은 모든 것을 회의하고 고민했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모든 것에 대해 회의하는 태도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진리를 알려고 애썼던 그들을 따라갔다.

여전히 "계시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가?"에하기가 어렵다. 당연한 것이지만 철저하게 의심해보면서 누가 주입해준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 

 

 

몽테뉴는 자신을 <편견이 없는 철학자>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신의 사상과 삶을 표현하는 일련의 고정된 관념들에 지적으로 제한되지 않은 철학자를 의미한다. 그가 완전히 합리적으로 반론의 제기가 가능한 교의에 빠졌다면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그의 소망은 충족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문제가 명석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매우 몰두했던 사물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문제들과 같은 경우였다. 몽테뉴는 <저것이 참일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이것이 참일 가능성도 없다>라고 주장한 회의주의자들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회의주의의 이러한 입장은 상식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바가 그 경우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몽테뉴에게 회의주는 해방시켜 주는 힘이었다. 그것은 다른 철학 체계의 고정된 이론으로부터 벗어나고, 매우 역설적으로 말해 회의주의 이론 자체로부터도 벗어나는 힘이었다. 진정으로 회의적이기 위해서 우리는 몰두하고 있는 바로 그 회의의 과정을 의심해야 한다. 또한 그렇게 하여 그 자체의 이론적 힘에 동요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교의에도 영구적으로 빠지지 않는 대신 끊임없이 탐구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새뮤얼 이녹 스텀프, 제임스 피저 저, p.316-317

 

 

새물결 아카데미 홈페이지: http://hwacademy.kr/

여기에서 다양한 강좌를 만나볼 수 있으며, 후원을 하면 다양한 강좌를 온라인으로 볼 수 있다.

 

+덧

의심의 태도는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데카르트로부터 받아들인 주체적인 의심, 그리고 흄으로부터 받아들인 겸손한 의심.

알기 위해 끝까지 의심하는 것이 철학의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dubito ut intelligam 

Posted by 실버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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